[藥에 멍드는 노인들] [1] 약물 과다복용 실태 5개 이상 복용 '다약제' 노인 많아… 관절염·치주염에 위장약 중복 노인에 해로운 부적절 처방도… 환자 개인별 약 부작용 검토해야
82세 김모 할아버지는 매일 15개가 넘는 약을 먹는다. 20년 전 당뇨병·고지혈증·관절염약을 먹기 시작했고, 최근엔 전립선비대증·백내장약을 추가했다. 기침·가래가 심할 때면 종류를 더 늘린다. 자녀들이 챙겨준 오메가3·글루코사민·종합비타민도 거르지 않는다.
85세 김모 할머니는 하루 27개의 약을 먹는다. 심방세동약 8개, 당뇨병약과 요실금약 각 4개, 위장약 3개, 치매약과 요통약 각 2개 등이다. 27개 중 3개는 어떤 목적으로 처방됐는지 모른다.
◇치주염도, 관절염도… 위장약 중복
노년층들의 과도한 약물 복용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 모든 약(藥)은 독(毒)이다. 효능과 함께 부작용을 갖는다. 과도한 복용은 약을 독으로 변화시킨다. 노년층의 경우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중복처방 때문이다. 대개 4~5종의 병과 '동행하며' 사는 노년층에게 중복처방의 위험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약으로 병을 다스리려다가, 독으로 병을 악화시키게 된다.
대표적인 경우가 위장약이다. 위장약은 각기 다른 진료과 의사들에 의해 흔하게 중복처방된다. 치주염을 치료할 때도, 관절염을 치료할 때도 위장약이 처방된다. 위장약은 위산 분비를 억제한다. 중복처방으로 과도하게 섭취할 경우 장염·폐렴의 위험이 높아진다.
진통제도 노인들의 처방전에 포함되는 경우가 흔하다. 항혈전제도 혈관 질환이 많은 노년층들에 단골 약이다. 항우울제 아미트립틸린은 신경통약으로도 쓰인다. 우울증과 신경통을 함께 앓는 노년층들에게 중복처방의 위험이 높은 약물이다.
◇처방 약 10개 이상 95만명… 노인 다수
처방 약을 10개 이상 먹는 사람이 지난해 기준으로 95만명을 넘는다(건강보험 통계). 대다수가 노년층이다. 국내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전체의 15%인데, 지난해 건강보험 전체 약품비의 41%(7조3027억원)가 이들의 약값에 쓰였다. 2017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인 10명 중 9명이 만성질환을 앓는다. 결과는 '다약제' 노인의 증가다. 복용 약이 5개 이상일 경우, 다약제란 용어가 따라 붙는다. 노인들의 경우 진료를 받을 때마다 평균 3~4개 약을 처방 받으니, 다약제가 일반적이다.
◇약 개수 늘수록 '부적절' 처방 증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복용 약이 5개 이상인 다약제 노인에서 부적절한 처방이 다수 발견된다. 다약제 노인들의 경우 47%가 부적절한 약을 먹고 있었다. 4개 이하 약을 처방받은 그룹보다 33%p 높은 수치다.
고령 인구가 많은 일본에서 심도 있는 연구 결과가 이미 나왔다. 2016년 일본 지바대학병원 조사에 따르면 노인 환자의 26%가 10개 이상의 약을 복용 중이었는데, 이 가운데 절반(48%)에서 고령자 주의 약물이 발견됐다. 가장 많이 처방된 부적절 약은 낙상 위험을 높이는 벤조디아제핀계 약물, 인지 기능을 떨어뜨릴 수 있는 비벤조디아제핀계 약물, 신장 기능 장애를 높이는 H2차단제 등이었다.
한국병원약사회 서예원 노인약료분과장(분당서울대병원)은 "약 개수가 많으면 노인에게 부적절한 약이나, 동일한 효능의 약이 중복됐거나, 약물 간 상호작용을 일으킬 약이 포함될 가능성 높아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의료원 김무영 가정의학과장은 "약의 이득과 위험을 잘 평가해야 하는데, 약이 늘면 이득보다 위험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면서도 "그러나 단순히 5개 이상 다약제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노인 주의 약물 없는지 환자별 검토를
몸이 노화하면 생리적 변화로 소량의 약물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체수분과 근육량이 줄어 수용성 약물의 체내 분포 용적이 감소하고, 약 부작용이 증가한다. 체지방이 증가해 지용성 약물의 반감기가 증가하고, 위장의 pH(수소이온농도)가 증가해 산성 약물의 흡수력이 떨어진다. 간 대사력과 신장 기능도 떨어져 약물 부작용을 높인다. 부작용을 감당할 예비능력도 부족하다.
중년에겐 문제 없던 약물이 '노인주의약물'로 분류되는 이유다. 신경전달물질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방해하는 항콜린제가 대표적이다. 옥시부티닌 등 항콜린제 성분을 노인에게 쓰면 인지기능 저하·혼동·낙상·섬망 등의 중추신경계 부작용과 배뇨장애 등의 말초신경계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 약한 항콜린제를 2개 이상 중복 사용하는 것도 위험하다.
서울대 약대 이주연 교수는 "최근 세계 약학계에서 노인의 부적절한 다약제가 지적되고 있다"며 "필요하지 않은 약이나 부적절한 약은 없는지 환자마다 개별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