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힐링 스토리
광활한 아프리카 초원과 무리 지어 달리는 초원의 동물들, 열대우림 속 폭포, 홍학 떼가 군무를 펼치는 드넓은 강….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아프리카에 대한 로망이 있다.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 아무리 깊은 밤일지라도 한 가닥 불빛으로 나는 남으리. 메마르고 타버린 땅일지라도….” 대한민국 중장년층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아프리카 킬리만자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다.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가슴으로 불러본 세대이기 때문이다.
킬리만자로산보다 높았던 정상을 향한 열망
케냐와 탄자니아 국경에 자리 잡은 킬리만자로산(5895m)은 지구에서 가장 큰 휴화산이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고,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다. 적도 부근에 있지만 산 정상은 만년설로 덮여 있다. 메마른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눈을 볼 수 있는 곳이지만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정상 일부에 남아 있는 눈이 2020년이면 녹아 없어질 것으로 본다.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르는 여러 트레킹 코스 중 대표적인 루트로 마차메 루트와 마랑구 루트가 있다. 마차메 루트는 마랑구 루트보다 완만하지만, 코스가 길다. 산장이 없고 야영을 해야 한다. 걷는 난도가 높아서 위스키 루트로도 불린다. 마랑구 루트는 상대적으로 가파르지만 코스가 짧다. 코스 난도가 낮아 ‘코카콜라 루트’로 불린다. 이번 여행에서는 하루 일정으로 킬리만자로의 마랑구 루트를 선택해 진행했다. 시간이 없기도 했고, 해발 5,000m 이상까지는 무리라는 판단에서다. 탄자니아 제2의 도시 아루샤에서 차를 타고 마랑구 게이트(1850m)로 이동해 꿈에 그리던 킬리만자로에 두 발을 내디뎠다. 3~4시간 동안 울창한 열대우림을 가로질렀다. 깊은 초록빛과 황톳빛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분홍빛 작은 야생화가 무리를 이루고, 새소리·물소리와 함께 계곡을 가로질렀다. 4시간 정도 걷고 나니 산등성이에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만다라 산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상을 향한 열망은 킬리만자로산보다 높았지만, 킬리만자로를 직접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비록 하룻밤이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 순간만 간직한 채 가슴속에 묵혀두었던 킬리만자로산에 대한 열망은 내려놓았다. 구름바다 아래 펼쳐진 세상으로 다시 내려간다. 킬리만자로를 올라가는 동안 안전하게 산행하기 위해서 함께한 스태프들이 산을 다 내려와 마랑구 게이트 입구에 둥그렇게 서서 킬리만자로 노래를 합창한다. “잠보 잠보 브와나. 하바리 가니 음수리 사나” 노래 말 중 나오는 ‘하쿠나 마타타’는 ‘문제 없어요 걱정마세요’라는 뜻이라고 했다. 버스를 타고 어스름에 잠긴 킬리만자로 초입 마을인 모시를 지나며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응고롱고로, 세렝게티… 사바나 대초원을 가로지르다
킬리만자로를 뒤로하고 마사이어로 ‘큰 구멍’이란 뜻인 응고롱고로로 발길을 돌렸다. 응고롱고로는 1979년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아프리카에서 야생생물이 가장 많이 서식하는 거대한 분화구이다. 면적이 160km2인 곳인데 누(영양의 한 종) 수천 마리와 얼룩말, 코끼리와 사자를 비롯한 대형 포유류 50종, 타조에서 오리까지 조류 200종이 서식한다. 자연의 천국인 응고롱고로는 250만 년 전에 화산이 분화한 후 정상이 붕괴해 만들어졌는데 북서쪽의 라운드 테이블 힐이 고대 화산의 유일한 흔적이다.
전 세계 과학자들이 포식자와 먹이의 관계, 유전적 고립과 동계교배를 연구하는 이곳은 살아 있는 생태 연구소다. 분화구 밖에서 사는 동물과 달리 이곳의 동물은 이동하지 않는다. 일 년 내내 물과 먹이가 풍부해서 이곳을 떠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응고롱고로 분화구는 동아프리카 야생 생태계를 그대로 축소해놓은 곳이 되었다. 사바나 대초원에서 떠오르는 환상적인 아침 일출을 감상하며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의 꽃으로 불리는 세렝게티로 이동했다. 총면적 150만ha에 달하는 세렝게티 국립공원은 사바나 지역과 탁 트인 삼림 지역으로 구성돼 있다. 이곳에는 초식동물과 포식자들이 세계 최대 규모로 군집을 이루며 서식한다. 이 동물들은 지속해서 지역을 지나 대규모로 이동한다. 중앙 평원을 떠나 마르지 않는 물웅덩이가 있는 서쪽으로 떼를 지어 이동하는 모습은 장관이다.
세렝게티의 생태계에는 많은 생물이 있다. 매년 큰 규모로 이동하는 동물들로는 누(1950년대 19만 마리, 1989년 169만 마리, 1991년 127만마리), 얼룩말(약 20만마리), 톰슨가젤, 일런드, 토피영양 등이 있으며, 이들은 각각 자신에게 알맞은 풀을 뜯어 먹는다. 세렝게티와 응고롱고로를 합한 면적은 약 200만ha에 달하지만, 이 면적만으로 이동하는 동물의 생태계가 완전히 보호된다고 보장할 수 없게 되어 1929년부터 세렝게티 중앙의 22만 8600ha 지역이 사냥금지구역으로 지정되었다. 1951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59년에는 범위가 좀더 확대되었다. 1981년에는 인근의 마스와 동물보호구역(Maswa Game Reserve)이 세렝게티-응고롱고로 생물권 보전지역에 포함되었으며, 세렝게티 국립공원도 응고롱고로와 같이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한낮의 불타는 듯한 태양이 석양의 그림자를 드리울 때 우리는 세렝게티 깊숙이 자리한 럭셔리 캠프로 차량을 돌린다. 럭셔리 캠프는 경관이 뛰어난 곳에 자리하여 초대형 숙박캠프와 리셉션, 레스토랑 등 날것 그대로의 자연을 느낄 수 있게 배려한 숙박시설이다. 커다란 텐트 안에 초대형 침대 2개와 응접실, 샤워장, 수세식화장실이 갖춰져 있으며, 많은 마사이 스태프들이 고객의 편안한 휴식을 위해 노력한다. 특히 저녁식사 후 각자의 텐트로 돌아갈 마사이 전사들의 가드를 받으며 이동하는 이색 경험도 할 수 있다. 깊은 밤 온갖 동물의 울음소리에 놀라 깨기도 했지만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하룻밤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동이 트기 전에 따뜻한 옷을 껴입고 새벽 게임드라이브에 나섰다. 대부분의 육식동물이 사냥을 하는 시간이라 그런지 TV 속 <동물의 왕국>에서나 보던 사자 무리들의 사냥 장면은 가까이에서 직접 볼 수 있었다.
새로운 희망의 땅 아프리카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발길을 옮겼다. 2017년 최고의 여행지에 선정돼 전 세계 여행객들이 끊임없이 방문하는 곳, 그래서 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관광자원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케이프타운은 주민의 약 35% 이상이 백인이며 유럽풍의 대도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케이프타운의 전망대 격으로 통하는 ‘테이블마운틴’은 해발 1086m 높이로 정상 부분이 평평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전망대 부근에는 희귀동물과 실버트리, 킹 프로테아 등 약 1500종의 희귀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곳곳에 마련된 전망대에서는 발 아래로 펼쳐진 케이프타운의 아름다운 전경을 파노라마처럼 감상할 수 있다.
200km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테이블마운틴은 예로부터 아프리카의 남단을 항해하는 선원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했다. 1488년, 포르투갈 항해가인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유럽인으로서는 처음 이곳을 발견했고, 오늘날 이 산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가장 유명한 지형이 되었다. 케이블카가 있어서 정상까지 편하게 올라갈 수 있는데, 정상에서 케이프타운이 보이며 케이프 오브 굿 호프의 장엄히 펼쳐진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케이프타운에서는 다양한 해양동물을 만날 수 있다. 배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도착하는 도이커섬에는 수천 마리의 물개가 사는데, 좁은 바위섬에서 많은 물개들이 일광욕 즐기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이 섬의 포인트다. 극한의 추위가 있는 곳에서만 살 것 같은 펭귄들도 모여 살고 있다. 에메랄드빛 볼더스 비치는 무더운 아프리카와 펭귄의 이색적인 조화를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케이프타운에서 버스를 타고 희망봉으로 향했다.
희망봉은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아굴라스 곶의 북서쪽 160km 지점 케이프 반도의 끝에 자리해 있다.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발견했으며, 당시에는 ‘폭풍의 곶(Cape of storms)’으로 불렸다. 포르투칼인들은 1471년 적도를 넘어 현재의 가나, 즉 황금 해안을 황금 거래와 탐험의 기지로 삼으며 탐험을 하는 도중 격렬한 폭풍우에 휘말려 약 3주 동안 육지를 볼 수 없었다. 폭풍우가 가라앉을 무렵 당시 포르투갈 배의 상식에 따라 동진했지만 육지를 발견할 수 없었고, 그래서 과감히 북진을 감행했을 때 마침내 육지를 발견했다. 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도착한 것을 알게 된 그들은 해안선을 따라 항해해, 마침내 해안선이 북쪽을 향해 구부러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되돌아가는 도중에 큰 곶을 만났는데, 폭풍 때문에 가는 길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 데서 연유하여 ‘폭풍의 곶’이라 이름 붙이고 그곳에 석주를 세웠다. 1488년 귀환한 그들에게서 사정을 전해 들은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는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이 곶을 통과해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기에, ‘폭풍의 곶’이라는 이름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해 희망의 곶(Cabo da boa esperana)이라 개칭했다. 위쪽으로 솟은 산봉우리는 ‘희망봉’이라고 이름 지었다. 희망봉을 떠나 호텔로 이동하면서 우연하게 소리꾼 장사익의 ‘희망가’를 듣게 되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 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이로다.”
그날 아프리카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내 꿈속에서는 절망에 빠진 탐험가들의 탄식이, 또 그들의 슬픔과 희망이 오버랩되며 나타났다. 꿈에서 깨어 비탄에 젖은 항해사들이 킬리만자로와 희망봉을 바라보며 새로운 희망을 가졌듯이, 아프리카는 삶의 무게에 짓눌렸다 해도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고 또 다른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한 여행지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