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남성학
기예와 교양으로 시대를 선도한 ‘해어화’
1940년대 가수를 꿈꾸는 마지막 기생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해어화>가 흥행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가운데, 한류 스타의 성폭행 사건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사건의 내막은 경찰 수사로 밝혀질테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의 접대문화와 특정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유흥업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지난해 국내 기업들이 접대비로 사용한 돈은 9조3368억 원이고, 이 중 룸살롱·단란주점·요정 등 유흥업소에서 법인카드를 통해 사용한 돈만 1조1819억원이라고 한다. 개인이 사사로이 지출한 유흥비를 더하면 가히 천문학적 금액에 달할 것으로 보는데, ‘유흥업소의 꽃’은 접대부이다. 이른바 ‘텐프로’ 또는 ‘점오(5%)’ 업소에 종사하는 미모의 접대부들은 술자리에서의 봉사는 물론이고 비밀리에 성매매까지 서슴치 않는다고 한다.
성매매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것처럼 유흥산업과 접대 문화도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데, 접대부는 변질된 기생(妓生)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전문직 여성으로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기생은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한편,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거나 의료에 종사하거나 기예(技藝)로 우리 예술사에 적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후 술과 웃음, 그리고 성을 파는 ‘논다니’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생을 부르는 별칭인 ‘해어화’는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이다. 당나라 현종이 연꽃을 구경하던 중 양귀비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해어지화(解語之花)’에서 비롯되었다.
교방과 권번에서 철저한 교육으로 배출된 기생
기생은 신라시대 여성 화랑이자 무녀인 원화(源花), 또는 고려시대 양수척을 유래로 보는 견해가 있다. 다산 정약용은 문헌 기록을 통해 “백제 유기장의 후예인 양수척이 수초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이 남자는 노예로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다”라고 주장했다.
기생의 전성기는 조선시대였다. 조선시대 교방은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으로서 가무 등 기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이고 시·서화 등을 가르쳤다.
10세 미만의 어린 기생인 동기(童妓)를 모집해, 12세부터 교육했다. 춤을 잘 추는 기생은 무기(舞妓), 노래를 잘 하는 기생은 성기(聲妓) 또는 가기(歌妓), 악기를 잘 다루는 기생은 현기(弦妓) 또는 예기라고 불렀다.
외모가 뛰어난 기생은 미기(美妓)·가기(佳妓)·염기(艶妓) 등으로 불렀으며, 사랑스러운 기생은 애기(愛妓), 귀엽게 여기어 돌보아주는 기생은 압기(狎妓)라 했다. 의로운 일을 한 기생은 의기(義妓)로 칭송하기도 했으며, 나이가 지긋한 기생은 장기(壯妓), 기생의 우두머리는 행수기생으로 도기(都妓)라 불렀다. 이 외에 몸을 파는 기생은 창기(娼妓) 또는 천기(賤妓)로 폄하했고, 퇴물기생은 퇴기(退妓)라했다.
기생에게는 뒷배를 봐주는 기생서방, 즉 기부(妓夫)가 있었다. 벼슬아치 중 무인(武人)으로 왈패에 해당하는 종8품 벼슬의 포도청 별감, 승정원 사령, 의금부 나장 등만 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교방의 역할을 이어갔다. 권번은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이 운영하는 요릿집을 보호하고 화대(花代)를 받아주었다. 기생은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쳤다.
기생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번 기적에 오르면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생과 양반 사이에 태어난 경우라도 천자수모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기생이 양민으로 되는 경우는 속신이라 하여 양반의 소실이 되거나 재물로 그 대가를 치러 줌으로써 해방되었다. 기생이 병들어 제구실을 못 하거나 늙어 퇴직할 때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들여놓고 나왔는데, 이를 두고 대비정속이라 했다. 고전소설인 《추풍감별곡》에는 양반의 딸이 아버지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기녀가 되는 이야기도 있다.
기생에게 위안거리가 있다면, 첫째는 양반의 부녀자들과 같이 비단옷에 노리개를 찰 수 있다는 것, 둘째는 사대부들과 자유연애가 가능하다는 것, 셋째는 고관대작의 첩으로 들어가면 친정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이별과 배신을 되풀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속설에 기생이 잊기 어려운 다섯 가지가 있다. 맨 처음 남편(기부)이 하나며, 뛰어나게 잘 생긴 미남자가 둘이며, 정열적이고 씩씩한 것이 셋이며, 돈이 많아서 잘 쓰는 봉(鳳)이 넷이며, 추악해서 볼 수 없는 것이 다섯이라 했다.
기생 중에서도 독특한 기생은 약방기생이다. 약방기생의 시초는 조선조 태종 때 제생원사 허도의 건의에 의해 선발 되었는데, 궁중에서 비빈이나 내인의 질병을 치료한 데서 비롯된다. 삼남 지방의 관비 중 나이 어리고 영리한 자를 뽑아 올려 처음에는 제생원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혜민서에서 침구술을 가르쳤다. 내의원에 소속되어서 기생을 겸하기 때문에 약방기생이라 칭했다.
이밖에 침비도 독특한 기생이다. 어느 때에 비롯되었는지 기록이 없으나, 상의사(尙衣司) 소속으로 기생 역할도 하였다. 그 때문에 상방기생 또는 선상기라고도 불렀는데, 수입과 영향력에서 약방기생과 더불어 일류 기생으로 손꼽혔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기녀들의 애국심
오늘날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은, 나름의 자부심으로 전문직 여성의 길을 걸은 기생들과 비교할 때 많이 다르다. 몇 해 전 ‘아름다운재단’이 고정 수입의 1%나 유산의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는 캠페인을 할 때, 유흥업소에서 참여 의사를 밝히지만 거부되었다. 순수한 뜻이 훼손될 것을 우려한 결정이었는데, 구한말 기생들은 적잖은 독자금을 내놓았다. 당시 명월관의 기생 산홍은 한 친일파가 거금 1만원을 주며 소실이 되어달라고 유혹하자 “기생에게 줄 돈 있으면 나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고 단호히 거절했다.
또한 춘외춘도 경무총감이 독립지사들의 동태를 알려달라며 돈 뭉치를 건네자 이를 뿌리쳤으며, 그림과 서예에 능한 산월은 의암 손병희 선생이 서대문 감옥에 투옥되자 형무소 담 밑에 있는 초가를 빌려 수발을 들었다. 이밖에도 수많은 기생이 독립단체의 정보원으로 활동하거나 독립군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주었다.
특히 진주 기생조합의 기녀 50여 명은 1919년 기미년 3월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기개를 떨쳤다. 당시 시위를 주도한 기생 김향화는 징역 5개월을 살았는데, 동료 기생들이 꽃값으로 받은 돈을 영치금으로 넣어주었다고 한다.
김향화가 면회 온 기생들에게 “아무리 곤고할지라도, 조선사람 불효자식한테는 술 따라도 왜놈에게는 술 주지 말고 권주가도 부르지 말아라”고 당부하자, “언니언니 걱
정 말아요. 우리도 춘삼월 독립군이어요”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처럼 기생과 접대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차원이 다르다. 기예와 교양을 갖춘 기녀들이 자신의 희생을 통해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거나, 어쩔 수 없는 출생의 한계로 기생의 길을 선택한 것과 달리 접대부의 상당수는 명품으로 치장하기 위해 제 발로 유흥업소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성매매의 폐해이다. 성병은 물론이고 패가망신의 지름길이 성매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과 건강을 망치는 유흥업소에서의 술과 성접대에서 탈피해 공연이나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문화교제’ 풍속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김재영
남성 성기능장애, 발기부전 등 남성수술 분야를 이끌고 있는 강남퍼스트비뇨기과 원장. 주요 일간지 칼럼과 방송 출연 등을 통해 건강한 성(性)에 대한 국민 인식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