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속도로 즐기는 ‘알프스’

글 강미숙(헬스조선 힐링여행사업부|2016/04/25 10:39

스위스 하이킹 여행기


스위스 길은 천의 얼굴을 지녔다. 야생화가 흐드러진 들판 사이의 오솔길은 하늘을 뒤덮은 침엽수림 숲이 되고, 때로는 눈부신 설산으로 변한다. 또한 에메랄드빛 호숫가의 모습으로, 포도가 영글어가는 와이너리로 바뀌며 걷는 사람을 매혹한다. 걸으면 걸을수록 발걸음은 느려지고, 머릿속은 가벼워지는 진짜 스위스 여행을 떠나자.

 


레만 호수 옆에서 알알이 익어가는 포도밭 트레킹
테라스 밖은 온통 푸른색이었다. 맑은 공기가 응집된 하늘은 티끌 한 점 없이 파랬고, 하늘 아래는 더욱 짙푸른 호수였다. 호수와 하늘 사이에서 흰 눈을 이고 있는 산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호숫가 산책로에는 잠에서 막 깬 제라늄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잔 위로 말간 아침 햇살이 비쳤다. 이것이야말로 상상 속 완벽한 휴양지의 아침 풍경이었다. 바로 그 아침 나는 스위스 브베이(Vevey)에 있었다.

스위스 남서부 초승달 모양으로 드넓게 펼쳐진 레만 호수는 프랑스와 마주하고 있다. 일행 중 한 명이 호수 저편의 산이 몽블랑이고, 에비앙이 그 아래 있다고 말했다. 레만 호수는 동남쪽으로 알프스가, 북서쪽으로 쥐라산맥이 그림처럼 드리워져 있고, 기후가 온난해 예부터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찰리 채플린, 오드리 헵번, 록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 등이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삽입된 ‘별의 호수’ 소리가 녹음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로맨틱한 아침 풍경을 뒤로하고 나의 첫 스위스 여행 테마는 ‘기’로 정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스위스는 ‘하이킹의 나라’다. 알프스산맥과 쥐라 산맥 그리고 두 산맥 사이에 중앙고원이 펼쳐져 있으며, 곳곳에 빙하가 만든 깊은 계곡과 호수, 야생화 들판을 연결한 하이킹 코스가 6만km가 넘는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지구 한 바퀴를 돌고도 남을 거리다. “스위스를 모두 걸을 필요는 없지만, 스위스에서 조금이라도 걷지 않으면 자연에 미안한 일”이라는 한 여행 작가의 조언도 한몫했다.

 

▲ 로마인들이 BC 1세기경부터 라보에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했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 대부분의 와이너리에서는 포도주를 시음할 수 있다.

▲ 브베이에는 이곳을 사랑한 찰리 채플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체르마트에서 고르너그라트를 향해 오르는 톱니바퀴 열차, 고르너그라트반(Gornergratbahn). 오르는 내내 마터호른과 알프스 고봉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 서면 마터호른 외에도 4000m가 넘는 29개 산봉우리가 어깨를 나란히 한 설산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다.

레만 호수만의 정취를 오롯이 감상하려면 ‘라보 포도밭’이 제격이다. 레만 호수를 배경으로 산비탈에 펼쳐진 이 포도밭은 2007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단순히 포도밭이라기보다, 문화이고 자연예술이라 할 만하다. 길은 루트리(Lutry)에서 생 사포랭(St-Saphorin)까지 약 11km에 걸쳐 이어진다. 루트리역에서 내려 표지판을 보고 포도밭 사이로 난 길을 마음대로 거닐면 된다. 구슬땀을 흘리는 농부의 모습과 아기자기한 작은 마을이 교차되며 이어지고, 걷는 내내 레만 호수가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곳곳에 심겨진 장미와 나무 사이로 흐르는 계곡도 운치를 더했다.

피곤한 줄 모르고 얼마쯤 걸었을까. 와인 시음을 약속한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패트릭 퐁잘라(Patrick Fonjallaz) 씨는 에페스(Epesses)에 있는 자신의 와이너리에서 시원한 화이트와인을 내놓았다. ‘La Republique’란 라벨 뒤에는 1522년부터 이 와인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맨 아래 그의 이름도 있었다. 우리 일행은 포도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정자에서 무릎을 맞대고 와인을 나누었다. 갈증을 달래주는 청량함에 이어 달콤함이 목을 타고 넘었다.

스위스에 간다면 꼭 스위스 와인을 맛보라 권하고 싶다. 수출할 것도 없이 대부분 자국에서 소비되기 때문에 이곳이 아니면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스위스 최대 와인산지인 레만 호수에서 나오는 화이트와인은, 산비탈에 내리쬐는 따스한 볕과 온난한 기후, 빙하가 녹은 맑은 물이 만든 ‘최상급 신의 물방울’ 맛이었다.

 

▲ 체르마트(Zermatt)로 가는 빙하특급 열차

하늘 아래 첫 마을, 체르마트 하이킹
스위스에서 안 하면 서운한 것 중 하나는 ‘빙하특급 열차 타기’가 아닐까. 이동하며 볼 수 있는 알프스의 웅장한 자연을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다는 집념이 낳은 이 기차는 천장까지 유리로 돼 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체르마트(Zermatt)로 가는 빙하특급 열차에 올랐다. 호수와 포도밭이 사라진 자리에는 고개를 들어도 쉽사리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소나 양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초지, 굽이치며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협곡, 산비탈 마을로 곡예하듯 움직이는 케이블카가 순차적으로 나타났다. 신이 만든 한 편의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었다. 보고, 보고 또 봐도 감동적인 명작을 감상하고 나니 어느덧 종착역이었다.

체르마트의 첫인상은 동화 속 엘프가 살 것 같은 예쁜 모습이었다. ‘알프스의 여왕’ 마터호른 봉이 굽어보는 계곡에는, 샬레(아랫부분은 돌, 전체 골조는 나무로 된 주택)가 흩뿌려져 있었다. 기회가 되면 체르마트에서 머물러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마터호른이 노을빛으로 물들고, 아침 햇살로 반짝이는 모습은 오래 머물지 않으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체르마트에서 설산 감상의 최고 포인트는 두 곳이다. 등 산철도로 고르너그라트(Gornergrat) 전망대까지 오르거나, 케이블카로 로트호른으로 가는 것. 이번에는 해발 3089m의 고르너그라트 전망대를 택했다. 등산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약속이나 한 듯 모든 사람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눈부시게 하얀 빛으로 일렁이는 설해의 장엄함은 우리를 사로잡았다. 전망대는 360도 깎아지른 듯 솟구친 설산에 둘러싸인 섬처럼 느껴졌다. 스위스 최고봉인 3634m의 몬테로사(Monte Rosa)와 리즈캄, 츠빌링에, 브라이트호른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고, 그 옆으로 마터호른의 기이한 모습이 고르너그라트를 둘러싸고 있었다.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5성급 호텔이 우뚝 서 있다. 별을 보며 이곳에서 하루 묵는 프로그램도 있다지만, 야외 테라스에 앉아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설산의 감동을 한쪽으로 하고, 걸을 채비를 했다. 고르너그라트에서 열차를 타고 리펠알프(Reffelalp)에 내려 체르마트까지 내려가는 길은 2시간 정도 걸렸다. 겨울 스키 슬로프로 이용되는 초입 부분은 다소 가파른 게 흠이지만 조금 벗어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을 뒤덮은 침엽수림 숲이 나타났다. 고요한 숲에 발소리만 둥둥 울렸다. 눈 녹은 물이 길을 따라 작은 개울을 만들기도 하고, 폭포가 되기도 했다. 물 주변으로 풀이 돋아나고, 들꽃이 피어나고, 벌과 나비가 날아다니고…. 그 길은 결국 사람이 사는 마을로 이어졌다.

체르마트에서 사진엽서 속에 나올 법한 아기자기한 스위스를 만나려면, 수네가 하이킹에 도전해보자. 길도 평이하고 아름다워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다. 체르마트에서 지하로 연결된 푸니쿨라를 타고 4분이면 해발 2288m의 수네가에 닿는다. 날씨가 좋으면 손바닥만 한 고산 호수 리펠제는 아이들의 물놀이 터로 변하고, 한가로이 풀밭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어우러지면 낙원이 따로 없을 풍경이다. 운이 좋다면 호수 속에 비친 영롱한 마테호른과 알프스를 볼 수도 있다. 천국으로 가는 입구가 있다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아름다움이다. 안타깝게도 이번 여행에서는 천국의 입구를 보지 못했지만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리펠제부터 시작해 산책로를 따라 무스이에(Moosjisee), 그뤼엔(Grunsee), 그린드예(Grindjisee), 슈텔리제(Stellisee) 호수를 지나 블라우헤르드(Blauherd)에 닿을 때까지 세상의 모든 야생화를 모아놓은 듯한 들판을 거닐 수 있었다. ‘알프스의 목동’이 된 듯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 호수에 비치는 마테호른의 데칼코마니가 환상적인 리펠제 호수. 영롱한 호수 속 마터호른의 모습은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같이 신비롭다.

▲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산림보호지역 알레치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 하이킹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알레치 빙하. 길이 16km(최대 26.8km), 면적 115km2로 알프스에서 가장 크고 긴 규모를 자랑한다.

태고의 신비를 품은 알레치 빙하
발레 칸톤(주에 해당)은 마터호른뿐만 아니라 알프스 최대 규모의 빙하가 있어 ‘알프스의 심장’이라 불린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자연유산이자 유럽에서 가장 긴 알레치 빙하(Aletsch Glacier)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빙하 장관을 감상하는 다양한 코스가 있어 체력에 따로 골라 걸을 수 있다.

알레치 숲길은 고즈넉한 숲을 천천히 걸으며 빙하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코스로, 희귀 생태지역으로 보호받고 있는 알레치 숲에서부터 빙하의 끝부분을 둘러보는 길이다. 알레치 숲으로 난 작은 오솔길은 옛 사람이 1000년 동안 다녔던 통로를 그대로 1930년대 등산로로 만들었다. 인위적인 게 전혀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작은 개울을 건너고, 사슴이 목욕을 즐기는 늪을 지나 작은 나무와 덤불에 뒤덮인 야트막한 구릉이 융단처럼 펼쳐진 곳을 지났다. 영화 <반지의 제왕> 속세트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모든 것이 신비로웠다. 드디어 눈앞에 빙하가 긴 강을 이룬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보이는 곳이 빙하의 끝 지점인데 어렸을 때는 빙하를 걸어 곧장 계곡 너머 벨알프(Belalp)까지 다니기도 했죠. 알레치 빙하는 하루에 36cm씩 움직입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빙하는 녹아 없어집니다. 자연의 신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이드로 동행한 퍼러(Ferrer) 씨는 리더알프 태생으로 젊은 시절 스키 스턴트맨으로 할리우드에서 명성을 쌓은 뒤, 고향으로 돌아와 ‘ART FURRER HOTELS’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동네 뒷산 오르듯 알레치 숲을 나들며 그 역사를 방문객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멈춘듯 빙하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그의 말은 놀라웠다. 수만 년 동안 빙하가 녹고 얼면서 만들어진 알레치 숲과 리더알프의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은, 인간의 창작물보다 더 정교했고, 완벽했다. 새벽별을 보며 출발한지 다섯 시간 만에 다시 출발한 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길고 험난했지만 수고가 아깝지 않았다. 3시간 정도의 짧은 코스를 원한다면, 뫼렐역(Morel)에서 케이블카로 무스풀루(Moosfluh)까지 이동해 리더알프까지 걸으며 알레치 빙하를 감상할 수 있다.

목가적인 알프스 정취를 간직한 뮈렌, 알프스 산악 마을 그린델발트, ‘산들의 여왕’ 리기산…. 아직도 걸어보지 못한 스위스의 길이 많다는 것은 여행자에게 행복한 일이다. 자동차로 빠르게 보고 지나치는 관광 대신, 가슴이 뛰는 하이킹이야말로 제대로 된 스위스 여행법이 아닐까.

 


Tip. 헬스조선 ‘스위스 힐링 산책’ 떠나볼까?
헬스조선이 ‘알프스의 나라’ 스위스로 여행을 떠난다. 6월 23일~7월 1일(7박9일) 진행하는 ‘스위스 힐링 산책’은 단체여행으로 가기 힘든 지역까지 자유여행하듯 여유롭게 즐긴다. 하루 2시간 천천히 걷는 속도로 알프스의 대자연을 감상하는 일정이다. 체르마트 수네가 호수, 유럽에서 가장 긴 알레치 빙하를 감상하는 무스플루, 융프라우와 묀히, 아이거 3대 봉우리를 내려다보며 걷는 인터라켄 - 하더쿨룸 구간 등 스위스를 상징하는 대표 경관을 모두 둘러보고, 체르마트와 그린델발트에서 2박씩 머무는 것도 특별하다. 전원마을 그뤼에르, 고급 휴양지 베기스, 레만 호숫가 몽트뢰 등 주요 명소관광과 빙하특급 열차, 로이커바드 온천욕 포함. 1인 570만원(유류할증료·가이드 경비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