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대여점에서 무엇을 빌려 볼까 고민할 때가 있다. 특별한 사전정보도 없고 딱히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없을 때에 필자의 선택기준은 ‘권수’이다. 최소한 20권 이상 나온 만화라면 장르를 불문하고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고른다. 물론 이런 선택법의 성공확률은 상당히 높을 수 밖에 없다. 일정 수준이상의 재미와 작품성을 가지지 못한 작품이 그런 장기 연재가 가능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기준은 드라마 시리즈에도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다. 어떤 드라마가 10시즌 이상 롱런했다면 그 퀄리티는 완전히 검증된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더욱 흐름이 빠른 현대사회의 발전속도 속에서 10년동안 시청자들에게 인정 받은 시리즈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현대의 고전’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올해 12시즌을 시작한 은 그런 의미에서 ‘의학 드라마의 고전’이며, 드라마에도 ‘HALL OF FAME’이 있다면 시리즈 종료 후에 입성할 일만 남은 시리즈다.
의 주무대인 응급실은 생과 사가 교차하는 급박한 전쟁터인 동시에 환자와 의료진들의 갈등과 감동의 무대이기도 하고, 응급실에 밥줄과 커리어를 걸고 있는 간호사-의사들에게는 파워 게임의 장이기도 하다. 이렇듯 응급실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날줄로, 응급실을 지켜 나가는 중심인물들간의 변화 무쌍한 관계 양상을 씨줄로 엮은 스토리 라인은 10년이 넘어서도 여전히 흥미로우면서도 박진감 넘친다. 여기에 을 특징 짓는 역동적인 카메라 워킹과 속도감 있는 편집은 다양한 인물들의 다채로운 에피소드들을 전혀 지루함 없이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 첩보-미스터리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활력 넘치는 속도감이 롱런의 가장 주요한 요인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10년을 이끌어 오면서 수많은 출연진들이 오고 갔지만, 그 중심엔 닥터 그린이 있었다. 모든 의 캐릭터가 그렇지만, 특히 닥터 그린은 그 중에서도 평범한 캐릭터다. 외모도 수더분하고 성격도 그리 모나지 않다. 의사로서의 자존심은 상당하지만, 환자에 대한 배려심도 적당하다. 그렇다고 완전한 천사표는 아닌 것이 그 또한 적당히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평범함이 오히려 의 중심을 잡는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는데, 대중적인 인기는 훨씬 높았던 바람둥이 닥터 로스가 향도 빛도 좋은 자극적인 칵테일이었다면(조지 클루니 특유의 ‘흐흐흐’하는 웃음소리는 남자인 필자의 입장에서도 징그러운 동시에 확실히 매력적이다), 닥터 그린은 주식인 밥과도 같았다고 할까. 한편으론 은 긴 성장 드라마이기도 하다. 시즌 1에서 햇병아리 의대 실습생으로 등장하는 부잣집 철부지 샌님 존 카터가 ‘닥터 카터’로서 성장해 가는 과정이 드라마 전체를 이끌어 가는 또 다른 축이기 때문이다. 시즌을 거듭할 때 마다 기술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성장해 나가는 카터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흐뭇하다(마치 시청자들을 카터 부모의 심정으로 몰아 간다고나 할까?).
이번에 발매되는 시즌 4는 역대 드라마 사상 가장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에피소드 ‘Ambush’로 시작한다.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표방하는 의 컨셉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시킨 생방송 시즌 프리미어인 ‘Ambush’는 친절하게도 미국의 동부/서부 시차에 맞춰서 2번 촬영-방영되었다(따라서 각각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도 김기덕 감독의 <실제 상황>이 한번 촬영으로 영화 한편을 찍기도 했지만,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드라마는 매우 진기한 컨셉이었다(실시간 방송을 위해 카메라도 방송용 ENG카메라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 편만 화면비도 4:3이고 화면톤도 다르다). 때문에 마지막 디스크에 담겨 있는 30여분 분량의 제작 다큐멘터리 2편이 모두 'Ambush'에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 디스크 당 한편 이상 삭제장면이 담겨 있으며 일종의 NG컷 모음인 CUTups가 포함되어 있다.
시즌 4 DVD는 방영년도(1997/98)와 TV드라마임을 고려할 때 상당히 깨끗한 화질을 보여준다. 영상이 약간 더 샤프했으면 최상이었겠지만, 노이즈나 잡티 하나 없는 와이드 화면의 드라마를 대화면으로 무리 없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은 팬들에겐 큰 선물일 것이다. 사운드는 드라마 자체가 음악의 비중이 높다거나 사운드 효과가 많이 들어간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에 무난한 편. 서플먼트는 위에 언급한 내용 이외에 초회판 한정으로 들어가 있는 북클릿에 이번 시즌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팬이라면 이미 충분히 이 시리즈와 DVD의 장점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 테니, 아직까지 을 접한 적이 없는 분들에게 추천사(?)를 첨부하자면, 의학 드라마라고 해서 너무 진지하거나 지루할 것이라는 편견은 접어두길 바란다. 본문에 잠깐 언급했듯이 지루하기는 커녕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이 없을 뿐 스피디한 진행에 엄청난 중독성을 자랑하는 시리즈가 이다. 여기에 시즌제 드라마의 최대 단점 - 시즌이 끝나도 도저히 끝난 거 같은 느낌이 안 들 정도의 늘어지는 스토리라인 - 에서도 자유롭다. 마침 시즌 1, 2, 3도 ‘응급세일’(작명센스에 대해서는 OTL. 지름병에 대한 응급 처방인 것인가) 중이니, 장기간 차분히 볼만한 드라마를 찾는다면 단연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2005.11.09.)